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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뉴스/문화

한국 시장의 유래

#바램 2017. 2. 3. 20:47



인류의 역사에서 시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물자를 교류하고 정보를 주고받고 싶은 욕구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때문에 오늘날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시장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시장은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고대의 시장은 제례가 열리는 제단 부근에서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제사가 거행되는 제단 부근에는 으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레 물자와 정보가 오고갔기 때문이다.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도 제단 부근에 장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 시장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490년(소지왕 12) 신라의 수도 경주에 관이 개설한 ‘경시’를 설치했다. 509년(지증왕 10)에는 ‘동시’를 설치하고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관청인 ‘시전’을 두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95년(효소왕 4)에는 동시 이외에 ‘서시’와 ‘남시’를 설치해 삼시전을 형성했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의 시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두 나라가 멸망 후 신라에 흡수된 규모를 보고 시장의 수를 추측해보면 백제는 향시가 140개 이상, 고구려는 1개의 경시와 160여 개의 향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는 상업을 천시하던 분위기 때문에 시장이 발전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송나라 서긍이 쓴 견문록 <고려도경>에 따르면, 당시 수도인 개성의 광화문에서 관부와 객관에 이르기까지 긴 행랑 모양의 ‘방시’를 축조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관에 의해 수도에 설치됐던 방시 외에 지방에는 ‘향시’라는 시장이 자연적으로 생겼다.

조선에서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는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임진왜란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국가로부터 독점판매 권한을 부여받은 ‘육의전’이 설치됐다. 이후 육의전으로 인한 갈등이 격심해지자 1762년(영조 28)에 육의전이 행하던 특권을 축소했다. 1791년(정조 15)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들에 자유 판매를 허락하면서 사설시장이 발달하게 된다. 서유구가 쓴 <임원십육지–예규지>에 따르면 당시 팔도의 장시 수는 모두 1052개이며, 이후 고종 때 작성된 <증보문헌비고–시적고>에는 1067개로 기록된 것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장시의 수는 크게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시장규칙’을 제정하면서 조선의 시장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상설 또는 정기 시장을 ‘제1호 시장’, 20명 이상 영업자가 건물 내에서 주로 곡물이나 식료품을 판매하는 공설시장을 ‘제2호 시장’, 위탁·경매로 어물이나 채소를 거래하는 시장을 ‘제3호 시장’으로 구분했다. 1910년에는 부평 깡통시장의 전신인 ‘부평 정시장’이 부산에 문을 열면서 공설시장의 효시가 됐다.

1945년 광복 무렵에는 상설시장 34개와 정기시장 407개, 도합 441개의 재래시장만 남았다. 이후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재래시장도 번창해 1977년 말에는 상설시장 724개, 정기시장 961개로 시장 수가 크게 늘었다.

1960년 말에 유통근대화 작업과 함께 등장한 슈퍼마켓은 1970년대 말부터 급격한 속도로 증가하며 근대적 대형소매기구의 대표적 형태가 됐다.

[위클리공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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